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문단 편집) ===# 일본 #=== [include(틀:역대 일본 영화 시장 흥행 상위)]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당시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보편화가 되었는데, [[스크린 독점|그 스크린을 독과점해서 다른 영화가 상영하는 기회도 막고]] 무려 1년간 초장기 상영을 해서 얻은 결과였다고 한다. 이후 일본 영화계에서는 센과 치히로 같은 사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한다. {{{#!folding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 비화 ▼ ||홍보를 시작할 시기가 되면서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 영화를 히트하게 만들어도 되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알다시피 「[[모노노케 히메]]」는 일본의 영화 흥행사를 바꾸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예술 거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런 현상이 또다시 일어나면 미야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마저 찾아왔다. 나는 미야의 장남인 [[미야자키 고로|고로]]에게 의논해보기로 했다. 마침 그 무렵,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건립계획이 완성되어, 녹지 설계 일을 하던 그에게 디자인을 포함해 모든 일을 맡긴 터였다. 나는 마음속의 우려를 말한 뒤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난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네. 첫째, 「모노노케 히메」의 절반쯤 히트하게 한다. 둘째, 「모노노케 히메」만큼 히트하게 한다. 셋째, 「모노노케 히메」의 두 배를 목표로 한다. 자네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노노케의 두 배로 히트하게 해주십시오.” “왜지? 자칫하면 아버지가 이상해지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지도 몰라.” “저는 미술관을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굉장한 녀석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일을 위해서는 가족도 돌아보지 않는다. 과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뒤에도 망설임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내게 마지막으로 불을 붙인 사람은 [[하쿠호도]]의 후지마키 나오야였다. 나중에 「[[벼랑 위의 포뇨]]」의 테마송을 부른 사람이다. 어느 날, 아카사카의 길거리에서 후지마키를 우연히 만나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당시는 광고회사인 [[덴쓰]]와 하쿠호도가 한 작품마다 번갈아 [[제작위원회]]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덴쓰 차례라서 그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토라졌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덴쓰는 참 좋겠더군요. 업계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절반은 갈 거라고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솟구쳤다. ‘뭐? 다들 그 정도밖에 평가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디 한번 팔 걷고 나서볼까…….’ 그동안 경험을 쌓은 덕분에 영화를 히트시키려면 어떤 식으로 홍보하고, 어떤 흥행 체제를 구축하면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대충 알게 되었다. 나는 일단 대원칙을 세웠다. 홍보 물량도, 상영관 숫자도 「모노노케 히메」의 두 배로 정한 것이다. 홍보에서는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는 [[가오나시]]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홍보 관계자를 모아서 그렇게 말했더니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붙잡고 “이 영화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나?” 라고 물어보자 판에 박힌 듯이 치히로와 하쿠의 러브 스토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이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 콘티를 제대로 읽어보면 이야기의 중심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캐릭터별 등장 시간을 계산해보기로 했다. 그림 콘티에 쓰여 있는 컷별 초수를 꼼꼼히 계산했더니 1위는 단연코 치히로였다. 이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이 영화의 주제가 러브스토리라면 2위는 하쿠여야 한다. 그런데 2위는 가오나시였다. 명확한 숫자를 보여주면 모두 이해하리라고 여겼는데, 여전히 영화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오나시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로 홍보하겠다고 하면 누구나 당황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시대의 변화를 느꼈고, 등장 시간이라는 냉정한 현실도 있었다. 가오나시로 밀고 나가면 이 영화는 분명히 히트한다. 심지어 관객이 너무 많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깊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가오나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홍보 카피에도 변화가 생겼다. 처음의 메인 카피는 [[이토이 시게사토]]가 써준 ‘터널의 건너편은 이상한 마을이었습니다’였다. 그런데 [[도호]]의 홍보 프로듀서인 이치카와 미나미가 이의를 제기했다. “정말 이 카피만으로 괜찮을까요?” 이치카와의 장점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객관적인 시점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즈키 씨가 그러셨죠. ‘좋은 카피는 자기도 모르게 우연히 나와. 더구나 맨 처음에 한 말인 경우가 많지. 그런데 계속 검토하는 사이에 처음에 한 말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어. 그런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라고요. ‘이 영화를 히트하게 만들 열쇠는 철학이야’라고도 말했습니다. 그것이 옳은 말인지 틀린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노노케 히메]]」의 히트 이유가 ‘살아라’라는 카피 덕분이라면, 이번에도 철학적인 말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새로 서브 카피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때 그가 내놓은 것이 “살아가는 힘을 깨워라!”라는 카피였다. 치히로와 가오나시의 비주얼에 이 카피를 넣어 홍보하기 시작하자 상상도 못한 반응이 나타났다. 광고업계는 물론이고 교육기관에서도 ‘살아가는 힘’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질과 양 모두 전대미문의 홍보를 전개하는 가운데, 평소에 홍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미야가 웬일로 내 방을 찾아왔다. “스즈키 씨, 왜 가오나시로 홍보하지?” “이건 치히로와 가오나시의 이야기 아닌가요?” “뭐?”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치히로와 하쿠 이야기잖아……?” 홍보 관계자뿐만 아니라 감독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드는 당사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다. 그즈음 영화 흥행 시스템도 크게 달라졌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한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 시절에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한 관에 한 스크린이라는 옛날식 극장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 흥행은 앞에서 이끄는 리더에 의해 정해졌다. [[도호]]라면 사내의 흥행 전문가가 “이 영화는 이 정도 히트할 것 같다”라는 예측을 세우고 도쿄의 중심 극장을 정한다. 그러면 그 규모에 연동해서 지방 극장이 정해진다. 상영기간도 이미 계약으로 정해져 있어서, 개봉하기 전부터 흥행 수입을 대략 계산할 수 있다. 공급량을 계획적으로 정한다는 면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미국에서 온 [[워너 브라더스]]는 일본의 종합 소매업 회사인 마이칼과 손잡고 워너 마이칼 시네마즈를 만들어, 흥행업계에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자유경쟁 원리를 도입했다. 그로 인해 개봉과 동시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멀티플렉스의 여러 스크린을 석권하는 일이 벌어졌다. 관객이 물밀듯 밀려들면서 다른 영화를 걸려고 했던 스크린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돌아서는 등 시간이 갈수록 상영관 수는 더욱 늘어났다. 지브리 사상 최대의 전국 프로모션도 효과가 있었다. 웬만한 프로모션에서는 가지 않는 작은 도시까지 찾아가 관객을 직접 만났다.「모노노케 히메」 때 얻은 경험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모든 스크린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뒤덮였다. 나중에 집계한 수치를 확인하니 개봉 첫날의 관객은 놀랍게도 42만 명이었다. 두 편을 동시에 상영했던 「[[반딧불이의 묘]]」와 「[[이웃집 토토로]]」의 4주간의 흥행이 45만 명이었는데, 그에 필적할 만한 숫자를 불과 하루 만에 기록한 것이다. 급기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1년의 장기 흥행 끝에 관객 2,380만 명, 흥행 수입 308억 엔이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만들었다. (훗날 재상영까지 포함하면 316억 8천만 엔) __여기에는 공과 죄의 양쪽 측면이 모두 깃들어 있다. 우리가 [[스크린 독점|스크린을 독과점]]함으로써 흥행할 수 있는 다른 영화가 잠식당한 것이다. 그 사태를 무겁게 바라본 일본의 영화업계에서는 그 이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같은 메가히트를 내지 않겠다는 분위기에 휩싸였다.__||}}} 무려 '''20년간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순위|일본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초메가히트작'''으로,[* 비교하자면 한국의 명량이 8년간 1위를 기록하였으며, 아바타가 약 15년간 1위를 엎치락뒤치락하며 기록해오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highest-grossing_films_in_Japan|#]] 흥행 성적면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리즈시절|전성기]]를 보여줬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1년 7월 20일에 개봉, 총 308억 엔(달러로 2억 2,960만 달러)을 벌어들이며(2,350만 관객 동원) 《[[타이타닉(영화)|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260억 엔 기록을 깨며 '''일본 극장 개봉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갈아치웠다. '''실사영화까지 포함'''한 역대 흥행 1위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453일 연속 상영되기도 했는데 이 방면에서도 일본 영화 역대 1위이다. 2014년 기준 본작의 총 흥행 수익은 약 2억 9천만 달러 정도이며 영화사상 역대 비할리우드 작품 흥행수입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흥행 대부분이 일본 내수에서 벌어들인 것이라 이 기록은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자국 시장만으로 자국 영화 흥행 1위가 3~4억 달러를 넘기는 [[중국]] 때문에 더더욱 이 기록은 인정받지 못했으며, 이후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이 거둔 전 세계 흥행 4억 2,600만 달러[* [[프랑스]]에서도 대박(1억 6,600만 달러)이지만 [[독일]](7,980만 달러), [[일본]], [[북미]], [[한국]], [[스페인]] 등에서 1,000만 달러가 넘게 벌어들이며 전 세계적으로 골고루 흥행에 성공해서 비할리우드 영화로 세계 최고 흥행작이 될 만했다.]로 깨졌다. 광미디어 판매량 역시 어마어마한 대박을 쳤는데, BD/DVD에서 '''430만 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 다만 이것도 일본에서만 팔린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 추산해도 500만 장 정도.]를 올리며 모든 재패니메이션 가운데 역대 1위의 기록을 올리고 있다.[* 역대 2위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DVD 12권 합계 210만 장.] 한때 애니메이션 분야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미국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일본에서만 460만 장이 넘게 팔리면서 재패니메이션 분야 1위 기록으로 밀려났다. 참고로 겨울왕국은 전 세계에서 73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중국 박스오피스가 합산되면서 [[너의 이름은.]]을 재역전했다. 개봉한 지 19년이 지나 2020년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에 밀려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순위|일본 내 흥행수익]] 2위가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경쟁작들이 죄다 연기되거나 OTT로 가서 경쟁작이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테넷,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전부였다.] 스크린을 점령하다시피한[* 극장이 귀멸에 스크린을 몰아 줘서 전국 403관에서 상영했고, 1일에 30~40회(이전 대작들도 보통 10~20회) 이상 가는 상영 횟수와 극장 좌석의 55%를 점령([[너의 이름은.]] 전성기 때도 20%)해 라이벌이 없는 전대 미문의 상영 환경이었다. 물론 이건 환경 문제뿐만이 아니라 귀칼 자체가 인기 있었던 탓도 있었다.], 무려 880만명 분이라는 전대미문의 관람객 특전이 있었던[* 10월 16일 450만, 11월 14일 150만, 11월 28일 100만, 12월 12일 75만, 12월 26일 105만, 3월 27일과 4월 3일 100만. 표값으로 대략 환산하면 190억 엔에 육박한다.] 귀멸의 칼날과, 쟁쟁한 경쟁작과 경쟁하고,[* 공개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개봉된 경쟁작: Al, 진주만, 쥬라기 공원 3, [[혹성탈출(2001년 영화)|혹성탈출]], [[세레비, 시간을 초월한 만남]].] 무엇보다 특전이 없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같은 조건이 주어진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단 귀멸의 칼날도 코로나 시국에 찍었던 기록이고, 귀멸의 칼날은 TVA의 연장선인 '극장판'이란 것을 감안해야 된다. 시기상 블루레이 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는 3000장 정도가 팔렸다고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기도 힘들었고 실제로 잘 팔린 애니들은 몇 십만 장이나 팔렸을 수준이다. 현재 블루레이 시장이 1000장 정도만 팔려도 평타는 친다는 걸 생각해보자.] 그 당시는 일본 애니의 전성기였다는 차이점이 있으니 이 점에선 센치행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